단 하나의 서핑보드를 들고 떠난 세계여행. 발리에서 시작해 하와이, 호주, 포르투갈까지, 파도를 따라 이동하며 배운 삶의 지혜와 자유의 진짜 의미를 기록한 여행 에세이.
서핑보드가 여권이 된 순간
처음 서핑을 배우던 날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인도네시아 발리 꾸따 해변,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물결, 낯선 보드 위에 몸을 올렸을 때의 불안정한 감각. 하지만 첫 번째 파도를 잡아냈을 때, 두려움은 기묘한 황홀감으로 바뀌었습니다. 파도가 저를 밀어내며 물 위를 미끄러지는 짧은 순간, 모든 생각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서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저는 보드 한 장을 들고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충동이라 부를지 모르지만, 제게는 새로운 삶으로 향하는 초대장이었습니다.
여행 준비는 단순했습니다. 낡은 트래블 백팩, 튼튼한 보드 백, 그리고 몇 벌의 옷이 전부였습니다. 계획표 대신 지도에 작은 점 몇 개만 찍어두고, 나머지는 파도가 이끄는 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처음 비행기에 오를 때의 그 설렘과 두려움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내가 정말 이걸 해내는 걸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곧 마음속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해보지 않으면 평생 모를 거야.”
세계 일주하며 보드 한 장으로 배운 것들
발리에서의 며칠은 제게 서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해주었습니다. 새벽 다섯 시,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해변에서 보드 위에 앉아 동쪽 하늘을 바라보던 시간은 명상과도 같았습니다. 파도가 오는 방향을 가늠하며 숨을 고르고, 그 순간이 오면 몸을 던졌습니다. 실패는 수십 번이었지만, 한 번의 성공이 모든 걸 보상해주었습니다. 발리는 제게 인내를 가르쳤습니다. “좋은 파도는 기다림 끝에 온다.” 한 현지 서퍼가 해준 이 말은 제 여정의 첫 번째 교훈이었습니다.
하와이의 파이프라인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서퍼들이 모이는 그곳에서 저는 단번에 초라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곧 경외심으로 바뀌었습니다. 현지 서퍼 한 명이 다가와 말했습니다. “파도를 이기려 하지 말고,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그 짧은 한마디가 제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파도를 제압하려던 몸부림은 멈추고, 그저 함께 흘렀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바다와 하나가 되는 감각을 느꼈습니다.
호주 골드코스트에서는 서퍼들의 일상이 곧 제 삶이 되었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보드를 들고 해변으로 나가고, 낮에는 해변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한 노년의 서퍼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핑은 젊음의 스포츠가 아니야. 바다를 사랑하는 모든 이의 스포츠지.” 그의 주름진 얼굴은 바람과 파도가 새긴 시간이었고, 그 눈빛은 바다의 평온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와 함께 작은 파도를 타며 웃었던 순간은 이 여행에서 가장 따뜻한 기억 중 하나입니다.
포르투갈 나자레는 제 용기를 시험한 곳이었습니다. 괴물 같은 파도가 부서지는 광경 앞에서 저는 한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지 코치가 해준 말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두려움은 없앨 수 없어. 그저 안고 들어가는 거야.” 저는 결국 그 거대한 바다로 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비록 작은 파도만 탈 수 있었지만, 그날 느낀 성취감은 그 어떤 트로피보다 값졌습니다.
보드 한 장이 준 자유와 치유
세계일주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서핑보드는 제게 새로운 언어가 되었고, 바다는 모든 곳에서 제 집이 되었습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바다에서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파도를 기다리는 시간은 명상이 되었고, 바다에 몸을 맡기는 순간은 스스로를 비우는 연습이 되었습니다. 특히 새벽 바다에서 보드 위에 앉아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바라볼 때마다, 저는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떠나기 전 저는 늘 성과와 계획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저에게 삶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파도는 제 시간에 오고, 저는 그저 준비된 채 기다리면 됩니다. 그 간단한 진리를 깨닫는 데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해야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했지만, 동시에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서핑보드는 제게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꾼 나침반이 되었습니다.
파도가 알려준 삶의 진짜 속도
돌아오는 비행기 안, 저는 보드를 꼭 껴안고 있었습니다. 이번 여정에서 가장 큰 배움은 ‘삶의 속도를 늦추는 법’이었습니다. 서핑은 빠른 파도를 타는 스포츠 같지만, 사실은 느리게 기다리는 시간이 대부분입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저는 스스로를 돌아봤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드 한 장으로 떠난 세계일주는 제게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수업이었습니다. 언젠가 다시 바다로 나가 파도를 탈 그날을 꿈꾸며, 오늘도 그 경험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