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유학 시절, 부모님이 처음 유럽에 오셨을 때 제가 직접 가이드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파리 1박, 독일 2박, 체코 2박, 런던 5일로 이어진 일정은 짧고도 빡빡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추억과 해프닝이 담겨 있었습니다. 부모님께는 첫 유럽여행이었고, 저에게는 유학생으로서 부모님께 '내 일상과 유럽'을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각 나라에서의 순간들을 에피소드와 함께 풀어내며, 실제로 느꼈던 감정과 여행 팁을 함께 담아보았습니다.
파리 1박의 압축 일정
부모님이 가장 기대하시던 도시는 단연 파리였습니다.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로 넘어갔는데, 바다 밑 해저터널을 지나갈 때 부모님은 “정말 바다 밑을 달리고 있는 거냐”라며 무척 신기해하셨습니다.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추억거리가 생긴 셈이었죠. 파리에서는 운 좋게도 에펠탑이 보이는 숙소를 잡아 아침, 저녁, 심지어 새벽까지 시간대마다 다른 에펠탑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침엔 햇살에 빛나고, 저녁엔 붉은 노을에 물들고, 밤에는 반짝이는 조명 속에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더군요. 부모님은 창밖만 바라봐도 감탄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첫 일정은 에펠탑이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보면 섭하지”라며 바로 올라갔는데, 바람이 거세서 엄마 머리카락이 흩날릴 때마다 사진 찍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탑 앞에서 찍은 부모님의 웃는 얼굴은 여행의 피곤함을 단번에 잊게 해주었습니다. 루브르는 규모가 너무 커 하루 일정에 맞지 않아 대신 오르세 미술관을 선택했는데, 모네와 르누아르 작품 앞에 선 부모님은 “책에서만 보던 그림을 이렇게 직접 보다니”라며 감동하셨습니다. 점심에는 미리 예약해둔 미슐랭 가이드 레스토랑에서 프렌치 코스를 즐겼는데, 의외로 부모님 입맛에도 잘 맞아 오히려 저보다 더 맛있게 드셨습니다. 저녁에는 몽마르트 언덕에 올라 파리 전경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이건 TV에서만 보던 건데, 내가 지금 여기 있네”라며 감탄하셨죠. 마지막으로 센강 유람선을 타고 도시 불빛을 따라 흐르며 반짝이는 에펠탑을 바라봤는데, 그 순간은 정말 영화 속 장면 같았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파리의 화려함을 압축해 부모님께 보여드릴 수 있었던 강렬한 일정이었습니다.
독일 2박 여정
파리에서 독일로 넘어가자 도시 분위기는 한결 차분해졌습니다. 뮌헨 시내 광장을 걸으며 마주한 단정한 건물들은 부모님이 상상하던 ‘정돈된 유럽’의 모습과 꼭 맞아떨어졌습니다. 특히 독일 맥주는 부모님 입에 딱 맞았습니다. 현지 맥주홀에서 커다란 잔에 담긴 라거를 들이키며 아버지는 “역시 독일은 맥주야”라며 연거푸 두 잔을 비우셨습니다. 소시지와 함께 곁들이니 금세 얼굴이 환해졌고, 파리에서 음식이 조금 낯설어 힘들어하시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엄마도 “독일 음식은 한국에서도 먹는 느낌이 난다”며 만족스러워하셨습니다.
하지만 독일 일정에는 무거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수용소 유적지를 방문했는데, 안내 동선을 따라 미로처럼 이어진 좁고 긴 길을 걷는 동안 묘한 압박감이 몰려왔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옮길수록 숨이 가빠지고 어지러워,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나고 토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부모님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전시물을 보셨는데,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당시의 무게가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화려한 관광지에서 느끼지 못하는, 여행이 주는 또 다른 의미를 경험한 순간이었습니다.
다행히 이후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서는 독일 특유의 정돈된 분위기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었습니다. 대중교통이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맞아떨어져 이동이 수월했고, 명절 연휴의 차분한 기운 속에서 부모님은 “마지막을 독일로 해서 마음이 정리되는 것 같다”며 안도하셨습니다. 시차적응중이라 조금 지쳐 있었지만, 독일의 깔끔하고 단정한 분위기가 전체 여정을 편안하게 마무리해주었습니다.
체코 2박의 느슨한 매력
독일의 정갈한 분위기 뒤에 이어진 체코는 한층 더 여유로운 매력이 있었습니다.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에서 천문시계를 바라보던 부모님은 “이게 진짜 유럽 같다”며 감탄하셨고, 까를교에서는 거리 악사들의 연주를 들으며 아버지가 연신 영상을 찍으셨습니다. “이건 한국 가서 자랑해야겠다”라는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체코에서 가장 놀라웠던 건 역시 맥주였습니다. 레스토랑에서 맥주가 물보다 싸고 맛도 훌륭해 식사 때마다 자연스럽게 곁들였는데, 아버지는 “이건 한국 돌아가면 못 잊겠다”며 연신 감탄하셨습니다. 심지어 프라하 외곽에는 맥주로 목욕하는 스파까지 있어 부모님과 함께 체험했는데, “이런 건 처음 본다”며 무척 즐거워하셨습니다. 음식도 생각보다 입에 잘 맞았습니다. 처음엔 굴라쉬가 낯설어 엄마가 망설이셨지만, 따뜻한 빵과 함께 먹으니 금세 맛있게 드셨습니다. 길거리에서 파는 ‘트르들로(굴뚝빵)’는 달콤한 시나몬 향과 고소한 맛 덕분에 부모님이 특히 좋아하셨습니다. “이건 한국 가져가야겠다”라는 농담까지 하실 정도였죠.
둘째 날에는 체스키 크룸로프를 방문했습니다. 버스로 3시간 넘게 이동하느라 피곤했지만, 동화 같은 마을 전경이 펼쳐지자마자 부모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구시가지 골목에서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했는데, 현지 주민이 친절히 안내해준 덕분에 오히려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체코에서의 이틀은 값싼 맥주, 맛있는 음식, 여유로운 풍경, 그리고 소소한 해프닝이 어우러져 부모님께 가장 즐겁고 편안한 일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런던 5일, 딸의 본진 투어
여정의 마지막은 제가 살고 있던 런던이었습니다. 유학생활의 무대를 부모님께 직접 보여드린다는 생각에 긴장도 되고 설렘도 컸습니다. 첫날에는 빅벤과 런던아이 같은 대표 명소부터 시작했습니다. 대영박물관에서는 제가 예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부모님께 직접 설명해드렸는데, 부모님은 “네가 설명하니까 더 재밌다”며 웃으셨습니다. 작은 개인 가이드가 된 듯한 순간이 뿌듯했습니다.
런던 일정 중 부모님이 특히 좋아하셨던 건 쇼핑이었습니다. 버버리 아울렛에 함께 갔는데, 평소 한국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할인율에 부모님이 깜짝 놀라셨습니다. 아버지는 넥타이를, 엄마는 클래식한 코트를 하나 장만하시며 “런던기념품이네”라며 흐뭇해하셨죠. 여정을 마치고 집에서 직접 스테이크를 구워 먹었던 저녁이었습니다. 여행 막바지라 외식보다는 집밥이 그리워져서, 제가 장을 봐와 스테이크와 간단한 샐러드를 준비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외국식 주방에서 함께 요리를 하고, 와인을 곁들이며 저녁을 먹던 그 순간은 런던 어디의 레스토랑보다 더 따뜻하고 편안했습니다. “딸 집에서 이렇게 밥 먹으니 네가 진짜 독립했구나”라는 부모님의 말씀이 오래 남습니다.
물론 한국 음식이 생각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한국 치킨집을 찾았는데, 바삭하게 튀겨진 치킨과 시원한 맥주 한 잔에 부모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역시 한국인은 한국음식이지”라며 크게 만족하셨죠. 외국에서 먹는 한국 음식은 그 맛이 배가 되어 더 특별하게 다가왔습니다.
무엇보다 런던에서의 5일 동안 날씨가 놀라울 만큼 좋았습니다. 평소 흐리고 비가 잦은 런던인데, 부모님이 오신 기간에는 연일 맑고 쾌청해서 어디를 가도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부모님도 “날씨가 이렇게 따라주니 다 복 받은 거다”라며 연신 즐거워하셨습니다. 런던 일정은 저의 생활과 일상을 부모님께 보여드리고 함께 나눈 시간이라 더욱 특별하게 기억됩니다. 부모님의 제가 사는 생활권으로 들어와서 여행하다보니 더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았습니다. 제가 살던 공간과 일상을 부모님께 보여드리면서, 그동안의 외로운 유학생활이 조금 따뜻해졌달까요.
추석동안의 짧은 10박정도의 일정이었지만 파리의 화려함, 독일의 깔끔함, 체코의 여유로움, 그리고 런던의 개인적인 의미까지 모두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유럽을 보여드리며 제가 살던 도시를 소개하는 것은 힘들면서도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 여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부모님과 제가 서로의 삶을 연결하는 특별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부모님과 함께 유럽여행을 계획하는 유학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힘들더라도 가이드 역할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이 시간이 지나면 무엇보다 값진 추억으로 남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