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순간은 꼭 유명 관광지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아무 계획 없이 앉아 있던 벤치에서, 낯선 현지인과 나눈 짧지만 밀도 있는 대화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습니다. 이번 글은 제가 어느 낯선 도시에서 경험한, 이름조차 모르는 현지인과의 벤치 대화를 기록한 이야기입니다. 그 대화는 날씨, 음식 같은 가벼운 주제로 시작해, 결국 삶과 선택, 후회와 기회라는 무거운 주제로 이어졌습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배경을 가진 두 사람이었지만, 그날 벤치 위에서는 이상하게도 ‘인생’이라는 같은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던 기분이었습니다.
벤치에 앉은 이유, 그리고 우연의 시작
그 도시는 제가 처음 방문한 유럽의 작은 항구도시였습니다. 관광지 지도를 접어 넣고, 항구를 따라 걷다 보니 바닷바람이 얼굴을 간질이며 머리를 어지럽혔습니다. 거리를 가득 채운 기념품 가게와 카페를 지나 어느 한적한 공원에 들어섰습니다. 공원 한가운데, 오래된 나무 아래 놓인 나무 벤치가 있었습니다. 그 벤치는 마치 ‘앉아도 좋다’는 듯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발걸음을 멈춘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아침부터 이어진 걷기와 사진 촬영으로 다리가 조금 무겁고, 카페에 들어가기엔 아직 커피가 당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벤치에 앉아 항구를 바라보고 있는데, 한 중년 남성이 제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습니다. 그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지만, 몇 분 후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여기 처음이죠?” 영어였지만, 억양이 조금 달랐습니다.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국에서 왔다고 답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지 추천이나, 날씨 이야기 같은 평범한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점점 깊어졌습니다. 그는 어부 집안에서 태어나 20대에 도시를 떠났다가 40대가 되어 돌아온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그는 바다를 ‘놓을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돈은 도시에서 더 많이 벌었어요. 하지만 매일 바다를 그리워하며 사는 건 견딜 수 없더군요.” 그의 말은 잔잔했지만, 그 속에 무게가 느껴졌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벤치에 앉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행지의 하루 한 구석이, 이렇게 누군가의 인생 이야기를 담아내는 자리로 변할 줄은 몰랐습니다.
현지인 벤치 인생대화에서 배운 선택의 무게
그와 나눈 대화의 흐름은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도시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를 이야기했습니다. 당시에는 바다가 지루했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는 바다와는 다른 종류의 고단함을 주었고, 사람 사이의 거리는 바다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고 했습니다. “도시는 편리하지만, 내가 나답다고 느끼는 순간은 드물었어요.”라는 그의 말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저도 제 경험을 나눴습니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다가, 잠시 일을 내려놓고 여행을 떠난 이유를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모험’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저 역시 ‘돌아갈 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는 제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떠나는 것도 용기지만, 돌아오는 것도 용기예요.” 그 말은 단순했지만, 묵직하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인생에서 고민하는 질문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이 길이 맞을까?’라는 의문을 품고, 때로는 그 의문을 평생 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벤치 위에서 그는 자신이 내린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바다를 보러 나가고, 그 바다에서 또 하루의 이유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대화는 1시간 넘게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서 중요했던 순간들을 이야기했고, 때때로 웃었으며, 때로는 잠시 침묵했습니다. 그 침묵조차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그는 제게 작은 조언을 건넸습니다. “여행할 때, 꼭 관광지만 보지 말아요. 벤치에 앉아 사람을 기다리는 것도 여행입니다.” 저는 그 말이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그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벤치가 가르쳐준 여행의 다른 이름
그날 이후 저는 여행지에서 벤치를 지나칠 때 그냥 걷지 않게 되었습니다. 잠시라도 앉아 주변을 보고, 혹시 누군가 말을 걸어올 기회를 열어두게 되었습니다. 벤치는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인연이 피어나는 자리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도시의 바닷바람과, 현지인의 조용한 목소리, 그리고 그가 했던 “돌아오는 것도 용기”라는 말이 지금도 제 귀에 남아 있습니다. 여행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은 사진 속 장면이 아니라, 그 순간의 공기와 감정, 그리고 대화입니다. 그 벤치에서 나눈 대화는 제 여행의 하이라이트였고, 동시에 제 삶의 방향을 잠시 멈춰 생각하게 만든 계기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길을 걷지만, 때로는 그 길이 교차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교차점이 바로 벤치 위였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저는 여행지에서 벤치를 찾아 앉을 것입니다. 거기서 만난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우연이 제 여행을 더 깊게, 더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벤치는 제게 여행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그것은 ‘멈춤’이고, 동시에 ‘만남’입니다.